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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몸을 부리는 곳

(17) 단편소설 <2번 종점> / 정이수

18-02-09 07:33ㅣ 양진채 (hanajay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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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식



종점이라는 말, 무겁다. ‘ㅈ’이 초성에 연달아 있어서 그 발음 자체로 무거운 느낌일까. 종점이 끝에 다다랐다는 느낌 때문일까. 무겁기만 한 게 아니라 어쩐지 쓸쓸한 기분까지 든다. 끝에 다다랐다는 것 때문에 무겁거나 쓸쓸하게 느낀다면 그건 내 경험치 때문일까.
언젠가 어느 버스 종점에서 버스가 여러 대 빈 공터에 정물처럼 자리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고 시동이 걸리고 뒤꽁무니에 힘찬 발동을 걸면서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게 전부일까. 잘 모르겠다. <2번 종점>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만은 분명했다.

효성동, 그것도 2번 종점 근처는 재개발로 들뜨는 곳이기도 하고, 고달픈 삶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구공장 사장이었던 나는 부도를 맞게 되고, 결국 구청 소속 생활쓰레기 수거원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쓰레기를 수거하는 지역이 자신이 살고 있는 2번 종점이다. 나는 괜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될까봐 두렵다. 게다가 냉담한 아내에게는 아직 말도 못 꺼내고 있다. 그런 그가 자주 찾는 곳은 2번 종점 위 산동네다.


하루벌이 일용직 근로자부터 가내공업 사장들까지 사는 정도와 수준도 천차만별, 산동네는 그야말로 인간군상들의 집합소였다. 하지만 그곳엔 또 그 나름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세 들어 있던 가구공장도 산동네 무허가 건물이었다. 공장을 접고서도 거의 매일 산동네를 찾았다. 그곳에 가면 굳이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외상술을 마시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아도 됐고, 고개 숙인 남자의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환경미화원이 되었다고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이 쏟아낸 냄새난 쓰레기 치우는 일이 이 사회의 시선으로 결코 좋아 보이는 직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화원 고시라는 말이 생겼어도 마찬가지였다.


“너 아직 배가 덜 고팠구나. 여덟 명 모집에 이백 명 넘게 몰린 곳도 있대. 경쟁률 이십오 대 일. 더 놀랄 일은 그중에 전문대 졸 이상 지원자가 반이 넘는다는 거야. 내 말이 안 믿어지면 지금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해 봐. 오죽하면 미화원 고시라는 말까지 생겨났겠어.”
정길이 말대로 눈 질끈 감고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될 일이었다. 가구공장을 접은 후 백수로 지낸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사실 내 처지에 이것저것 따질 형편은 아니었다
.



정길의 말처럼 배가 덜 고픈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이 사회 통념으로 몸에 밴 습관이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한번도 중심에 살아본 적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내가 중심일 때가 있었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들러리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에게 치이고 동생에게 받히고……. 생각해 보니 내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늘 언저리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런데 아주 잠깐, 내가 중심에 있던 때가 있기는 했다. 사업이 팽팽 잘 돌아갈 때 아내가 바라보는 나 김재명은 하나님과 거의 동급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았다. 사업도 가장으로서의 위상도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만족도 최고조를 찍은 것 같다. 그런데 고공행진을 하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가정의 평화도 남편의 위상도 하루아침에 바닥을 쳤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철저하게 자본을 중심으로 결정된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 나의 성품이나 인격, 가치관, 삶의 태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는 자주 갑질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갑질의 주체는 자본을 쥐고 있는 이다. 고만고만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개발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며칠 뜸한 사이 그새 또 동네가 달라졌다. 하긴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효성동 삼거리 근처에 지하철역이 생기고 산동네에 전문대학교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면서 생긴 기현상이다. 보상금을 노린 사람들이 무허가 가건물을 지어 세를 놓거나 임시로 살고 있는 것이다. 효성동 토박이와 그 일가붙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텃세가 만만치 않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짓다가 개발이 되면서 갑자기 땅값이 치솟는 바람에 초단시간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이다.

내 집 장만은 집 없는 설움을 경험한 서민들의 로망이다. 광고를 본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꾸역꾸역 변두리 효성동으로 밀려들었다. 공기 좋고, 학교 가깝고, 물가 싸고 서민들이 살기에 그만한 동네도 없었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은 꿈으로 끝이 났다.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이사철과 관계없이 들고나는 집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개발지역이 그렇듯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가 있는가 하면, 내 집 장만의 꿈을 안고 변두리인 2번 종점으로 왔으나 꿈이 꿈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다수의 서민이 있다. 그러니까 효성동 2번 버스 종점은 원도심이면서 개발이 시작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인다.


그새 버스 한 대가 또 들어오고 나간다. 2번 종점,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잠시 들른 간이역 같은 곳, 운행 중인 버스가 잠시 쉬었다가 5분 간격으로 돌아나가는 곳, 그럼에도 뭔가 정체 된 느낌이 드는 곳이 2번 종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도 나에게는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 누군가 술자리에서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하고 <해뜰 날>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뒤를 받쳐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하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해뜰 날>이 신나지만 않는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설<2번 종점>은 개발로 인해 동네 사람들 간의 사이가 갈리고, 삶이 갈리고 한숨과 눈물과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군상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가감없음이 좀 섭섭하기도 하다. 주인공인 내가 환경미화원이 되었다는 말을 할 때 그 일을 계속하기만 하면 친정으로 들어가버리겠다고 하는 아내가 그렇다. 작가는 끝내 그 아내와 나의 화해나 그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은 이렇게 가차 없다. 그러니 아무리 쨍하고 해뜰 날 있다고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소설의 내용이 퍽 유쾌한 것만은 아닌데 그럼에도 <2번 종점>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작가의 삶에서 묻어나는 유려한 문장이 깊은 맛을 내는 까닭이다.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커다란 누렁이 한 마리가 줄레줄레 내 뒤를 따라온다. 꼬락서니를 보니 유기견은 아닌 것 같다. 떠돌이 개나 길고양이들이 활보하기에 산동네만큼 좋은 곳도 없지 싶다.

목줄이 걸린 강아지처럼 강씨 뒤를 따라갔다.

타들어가는 담배처럼 한껏 부풀었던 물건도 제풀에 사그라들었다.

이제 간은 그만 보고 등 내밀 때 모른 척 업혀요.



버스 종점 중에서도 2번 버스 종점. 번호판이 한 자릿수인 버스들이 있다. 내가 어릴 때는 4번 버스와 5번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한 자릿수 번호판은 인천의 원도심을 주로 운행한다. 도시가 정비되고 새로운 길이 나고 아파트들이 들어선 곳에는 새로운 노선이 만들어지고 버스도 새로운 번호판을 단다. 그러니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풀기에 다른 버스 종점도 아닌 2번 버스 종점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종점은 끝에 다다라 다 부려놓고 빈 몸이 되어 쉬는 곳이다. 그러나 다시 그 빈 몸을 채우려 일어서는 곳이기도 하다. 고단한 삶들이 몸을 누이고 부비며 사는 곳. 그런 곳에는 내리는 눈도, 피우는 꽃도 좀 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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