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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 앞에서

(25) 낯선 뫼르소 - 두번째 고전 <이방인>을 시작하며

19-10-07 21:28ㅣ 김선 (kimhyun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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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은 Jacob 김선(춤추는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24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마치고 25회부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도전합니다.



두번째 고전 읽기 -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글: Jacob 김 선


 
Aujourd’hui, maman est morte.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슬픔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 보이는 슬픔과 보이지 않은 슬픔. 주인공 뫼르소는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내밀한 슬픔이 있나보다. 그런데 슬픔의 자락이 잡히질 않는다. 사람들의 죽음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에른스트 잉그마르 베르히만Ernst Ingmar Bergman(1918~2007)의 ‘제7의 봉인’이 떠오른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가운데 마지막 봉인을 뜻하는 제7의 봉인 앞에 서 있었던 14세기 유럽. 죽음이 일상화 되어 있었지만 죽음은 여전히 슬픔이다.

 

영화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 에서 신과 기사가 체스를 두면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제7의 봉인이 해체돼 버려 죽음이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20세기. 뫼르소에게  죽음은 단백하다.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고 한 한강의 시구는 뫼르소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 죽음의 사실을 심적으로 마주한 이들의 슬픔에 무미건조하게 대하는 타나토스의 모습은 바로 뫼르소인 것이다. 이런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의아해 하는 나를 의심해야 하는가? 생각이 많아진다. 뫼르소가 나를 뭔지 모르게 어지럽게 한다. 현기증을 유발시킨 그가 궁금하다. 궁금증을 풀기위해 천천히, 조금씩, 은밀하게 그를 따라 가 보리라.


“ 입관을 했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나사못을 뽑아 드려야죠....안보시렵니까? 네.
  왜요? 모르겠습니다...하긴 그러실 겁니다.”



  엄마의 입관 앞에서 뫼르소와 아랍인 여자 간호사는 서로 대화하고 있지만 간지(間志)는 알 수 없다. 의례적인 대화 속에서 뫼르소는 차갑고 의뭉스런 답변만 하고 있다. 그래서 낯설다. 죽은 엄마의 입관 앞에서 뫼르소는 주관적이다.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엄마가 죽은 아들 앞에서 간호사는 객관적이다. 의례적인 질문과 통념적 판단을 자연스럽게 한다. 뫼르소가 간호사와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낯설게 만든다. 그런 낯섦은 문지기도 마찬가지다. 뫼르소 등 뒤에 선 채로 그냥 있는 문지기의 행동은 뫼르소를 거북하게 만들고 있다. 어느덧 방 안에는 저물어 가는 오후의 아름다운 빛이 가득하다. 그 근처에는 모네Monet(1840~1926)의 <날이 저물어 가는 크뢰즈의 협곡>이 있을 것 같다.


 

출처: 네이버©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Ravin de la Creuse au déclin du jour


 
저물어 가는 빛이 주는 나약함 그리고 그 빛이 주는 불분명함이 거북한 상태에 있는 뫼르소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지랑이 핀 크뢰즈 협곡을 찾아가는 길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마랭고 양로원에서 엄마의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의 낯선 모습을 계속 지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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